수궁동(水宮洞) -④
궁동(宮洞)
<땅이름 이야기>
턱거리
턱거리는 오류동 경인로에서 수궁동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연세중앙교회 인근에서 수궁동주민센터 앞으로 지나가는 오류고가까지의 주변 마을 길목을 말한다. 이 길 어귀를 통해서 궁동으로 드나들었던 것이다. 이 도로를 지금은 부일로(富一路)라고 하는데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5동 굴다리오거리에서 경기도 부천시 일대를 거쳐 오류동 경인로와 교차하는 지점까지로 총 연장이 10.029km이다. 부천시에서 경인선을 따라 제일 먼저 개설된 도로라고 해서 부일로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턱거리(좌측-경인선 철길, 우측-연세중앙교회)
양지말
동쪽과 남쪽이 툭 트여 햇볕이 잘 드는 지형이라 양지말이라고 했다. 정선옹주 묘역 남쪽에 있는 예림디자인고등학교와 세종과학고등학교 주변에 있던 마을을 일컫는다. 옹주궁이 있던 궁골과 가까운 이곳에 안동권씨 후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정선옹주의 남편 권대임의 할아버지인 권협이 이곳에 정착한 게 1600년 무렵이라고 하니까 400년이 훨씬 넘어선 마을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일대가 빌라가 밀집한 주택가로 바뀌어 본디 양지말에서 조금 떨어진 ‘양지말생태공원’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지말생태공원
음지말·불당골
이정간(李貞幹)은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고려 공민왕 때인 1360년 궁동의 청룡산 일대의 넓은 땅을 사패지로 하사받아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산이 동쪽을 가로막아 햇볕이 늦게 들어 음지말이라고 하였다.
이정간은 1405년(태종 5) 강화부사로 재임 하던 중 당시 목장에 뛰어들어 말을 상하게 한 호랑이를 사람은 다치지 않고 포획한 공으로 비단을 하사받았다고 태종실록에 나온다. 600년 전 일이긴 하지만 강화도 섬에 호랑이가 있었다는 게 놀랍고 쉬이 믿겨지지 않는다.
이정간의 나이 70세 때 100세 노모를 모시기 위해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벼슬에서 사임을 했다. 세종대왕이 이를 알고 그의 효심을 높이 사 자헌대부중추원사로 승진시킨 후 궤장(几杖-국가에 공이 있는 늙은 대신에게 내려 주던 궤와 지팡이)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전의이씨 후손들은 세종대왕이 이정간에게 하사한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충성과 효도로 가업을 전승하고 인과 공경으로 세세손손 지켜 나가라는 뜻)의 어필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며 가훈으로 지킨다고 한다. 전의이씨화수회(全義李氏花樹會)에서는 조상 선양사업과 후손들 가르치기 위한 일을 지금도 이어 가고 있다.
전의이씨화수회 건물 앞 도로가 끝나는 막다른 지점 청룡산 자락에는 1960년대 중반 세워진 아담하고 정갈한 사찰이 하나 있다. 건너편 서쪽의 와룡산이 풍수지리적으로 남성적인데 반해 청룡산은 여성적인 기운을 띠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부천 방향으로 건너편 서쪽 와룡산 자락에 있는 원각사 주지 보련스님이 이때 세운 것이 비구니 사찰 관음사이다.
관음사 연혁기에 ‘관음사는 궁동 149-3 청룡산 중턱에 자리한 사찰로 비구니 보련 스님의 원력으로 정사를 건립하여 불당을 모시고 관음사라 명명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관음사
관음사 바로 북측에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가 있고 또 그 북측으로 서일주류(주)가 있다. 청룡산의 끝자락인 이 일대를 불당골이라고 했는데 옛날 이곳에 불당이 있어 불린 이름이라고 한다. 구로구 주말농장 부근 지역이다. 관음사 연혁기에도 예로부터 불당골로 불리던 곳에 절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불당골(중간 흰건물-서일주류, 우측-서울공연예고)
수룬
양지말과 음지말의 가운데 쯤에 있던 마을인데 그 이름의 연원을 알기는 어렵다. 서울지명사전에는 「궁동의 옛 이름인 ‘술은’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고 ‘술은’은 이곳이 조선시대에 부평군 수탄면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수탄을 ‘술탄’이라 했고 이 ‘술탄’이 다시 ‘술은’ ‘수룬’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수탄→술탄→술은→수룬의 변화과정은 납득할 수 없는 게 궁동지역이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 수탄면에 속했고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년)에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으로 되었다. 이때 수탄면에는 오류, 개봉, 고척, 항동, 천왕동 지역이 다 해당 되었는데 유독 궁동지역이 수탄으로 불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술은이 수룬으로 변했을 수도 있어 술은과 수룬을 같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수룬마을은 ‘수룬어린이공원’이 있어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수룬어린이공원
수렁고개·댓골고개
오리로가 끝나는 지점인 궁동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부천시 작동이고 우측으로 가면 양천구 신정3동이다. 작동 쪽으로 450m 쯤에 작동터널이 있고 신정3동 쪽으로 80m 쯤에 궁동터널이 있다. 작동터널 일대를 수렁고개, 궁동터널 일대를 댓골고개라고 하였다. 이 두 고개는 서로 혼용되기도 하였으며 수룬고개라고도 불렸는데 궁동에 수룬마을이 있어 여기서 나왔을 것이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 두 개의 터널이 지나가는 길이 신정로인데 2000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처음 공사를 할 때는 양쪽 산자락을 완전히 끊어내고 도로를 내려고 해서 지역주민들이 ‘터널공법’으로 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함으로써 다시 흙과 콘크리트를 쌓아 올려 터널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위에 나무를 심고 야생동물은 물론, 산을 찾는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생태로를 조성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작동터널과 궁동터널은 2001년 완공됐다. 후에 이곳을 지나는 ‘구로올레길’을 만들었는데 올레길이 도중에 끊기지 않고 이어지게 만들 수 있게 된 사연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댓골은 궁동에 있던 마을은 아니다. 조선 태조 때 개국공신 양경공 정희계(良景公 鄭熙啓)에게 궁동터널을 지나 지금의 신정3동 지역에 넓은 땅을 사패지로 주어 큰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해서 댓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궁동터널과 이어지는 매봉산 북측 자락에 경주정씨(慶州鄭氏)의 문중묘가 있다.
댓골을 죽동(竹洞)이라고도 했는데 대나무가 많아서가 아니고 큰골이 댓골로 다시 한자로 대동(大洞)이 되었고 대동의 대를 대나무 죽(竹)으로 해석하여 죽동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성지골(성짓골)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운동장 위쪽과 궁동삼거리에서 작동터널 가는 신정로 사이의 아래쪽 골짜기를 성짓골이라고 한다. 지금은 구로구청에서 운영하는 주말농장과 주민들의 농경지가 혼재되어 있다. 우리말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예전에 성(城)은 고개를 뜻하는 ‘재’로 쓰였다고 한다. 잣에서 ㅅ이 탈락하여 자가 되고 자가 또 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초기의 한글 변천을 살피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는 ‘월인석보에 ’성(城)은 자시라(성은 잣이다)‘라고 나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성지골은 당초 성저골(城底골)이었으며 발음이 변하여 성지골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재 아래 즉 고개 아래에 있는 골짜기에서 온 이름일 것으로 추측이 된다. 양쪽에 있는 수렁고개와 댓골고개 두 개의 고개가 이를 뒷받침 해 주고 있다.
성지골에는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박사(1906∼1987)의 별장 터가 있다. 궁동삼거리 못미처 오리로에서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운동장을 왼쪽에 끼고 난 좁은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성지골 끝부분이 나온다. 성지골의 가장 안쪽 수렁고개로 올라가는 경작지 일대에 유진오가 작품 구상을 위하여 기거했다는 별장 터가 있었는데 1989년 원인 모를 불이 나 별장은 전부 다 타고 벽돌만 조금 남았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성지골 입구에서 100m 쯤 지점,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운동장 바로 위쪽의 좌측 산자락에는 별장과는 다른 유진오의 집이 폐가가 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유진오 가옥(2019년 촬영)
유진오는 이 집에서 글을 썼다고 하는데 원래는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이었으나 나중에 누군가가 조금 증축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집 외부는 물론, 내부까지도 부서지고 먼지가 쌓여 거의 형태만 남아있는 정도이다. 집안의 한쪽 벽에 페치카가 있었던 것으로 봐서 당시에는 꽤 운치가 있는 집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유진오 가옥 페치카(2019년 촬영)
유진오는 서울 출생으로 1924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법학자이었지만 문학에도 깊은 조예를 보여 동료들과 문우회(文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3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45년 광복 후에는 고려대학교 법정대학장, 대학원장, 총장 등의 중요 보직을 맡았다. 헌법 제정에도 관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였고 법제처장을 역임하였다. 야당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여 신민당 총재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문학작품으로 유진오 단편집, 김강사와 T교수, 창랑정기(滄浪亭記)가 있고 수상집에는 구름 위의 만상(漫想), 젊은 날의 자화상, 양호기(養虎記) 등이 있다.
성지골에는 이명래고약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명래고약은 1906년 프랑스 선교사로부터 서양약학을 배운 이명래 선생(1850∼1952)이 개발한 종기치료제다. 필자가 어릴 적에도 종기가 나면 그 부위에 부모님들이 고약을 붙여주셨다. 웬만한 피부질환에는 다 고약을 썼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유진오는 1919년 성진순과 결혼했다가 1926년 사별하였고 1928년 박복례와 재혼하였으나 또 다시 사별하였다. 1956년 이용재와 세 번째로 결혼하였는데 이 사람이 이명래고약을 개발한 이명래의 막내딸이다. 이용재가 1970년대 성지골 공장에서 이명래고약을 만들었는데 수요가 줄어 1978년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지금은 어디쯤인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수년 전 고인이 된 전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조동래 이사장은 생전에 “당시 공장에서 고약을 구울 때면 고약한 냄새가 났었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유진오 가옥은 처음 취재 이후 5년쯤 지난 지금은 형태가 조금 변했다. 주인도 바뀌었는지 철망으로 집 주위를 둘러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으며 내부에도 나무 울타리를 둘렀다. 문학인, 교육자, 정치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인사의 흔적이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많은 아쉬움이 남아 안타깝기 그지 없다.

▶유진오 가옥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