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척동(高尺洞) -⓶
땅이름 이야기
고좌리(高座里)는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에 의해 고척리로 바뀌기 이전까지 부르던 고척동지역의 마을이름이다. 지금의 고척1동에 있던 마을로 고척초등학교 주변이며 고척동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고좌리의 음이 변하여 고자리 또는 고잘이라고도 불렀으며 고척동의 동명 유래가 되었다.
지금의 고척초등학교 일대는 사진에서 보듯이 주택과 아파트단지로 변해 고지대이었다는 것을 그다지 실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부근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사사모리’라는 일본인이 포도원을 경작했다고 한다.

▶고척초등학교(고척1동)
또 한편으로 고척동 지역을 지나가는 안양천변의 방죽을 최근까지 고잘이라고 불렀다는 소수 사람들의 얘기가 전하는데 고좌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고척동 주변의 안양천 방죽에서 소가 풀을 뜯는 모습을 찍은 옛 사진이 지금은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목가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고척1동 옛 사진전(이순이)
구로동쪽에서 고척교를 건너오면 오른쪽으로 동양미래대학이 있다. 그 학교 밑에 경인로와 연결되는 이면도로 주변으로 예전에 장터가 형성되어 이곳을 장터골이라고 불렀다. 고척스카이돔 바로 건너편이기도 하다.
안양천 전 구간에 걸쳐 건널 수 있는 다리가 거의 없던 그 시절,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조그만 배를 이용하여 건너다녔다고 한다. 지금의 고척교 아래쪽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가 안양천의 동쪼과 서쪽지역을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울과 인천을 오고 가기 위한 인근지역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듦에 따라 자연스럽게 장이 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고척스카이돔
고척스카이돔은 고척돔구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여러 번의 우여곡절과 변경과정을 거쳐 2015년 11월 개장하면서 수많은 야구경기와 공연을 통해 유명해졌으며 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서울시에서는 2005년 8월 고척동 서울스포츠컴플렉스 조성 기본계획을 세웠다. 2007년 7월 하프돔 야구장 건설을 위해 서남권 문화체육컴플렉스 건립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2009년 2월 돔구장 공사가 착공되었다. 2009년 4월 하프돔에서 완전돔으로 공사계획을 변경하였으며 2015년 9월 돔구장 공사를 완료하고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고척스카이돔(출처-나무위키)
하프돔을 완전돔으로 변경하게 된 것은 2009년 3월 우리나라가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준우승을 함에 따라 국내에 야구 열풍이 일어난 것과 연관이 있다. 당시 구로구청장이 사회적 분위기에 힘을 얻어 고척구장을 완전돔으로 변경할 것을 서울시에 건의하자 서울시장이 이를 받아들여 2009년 4월 15일 서울시에서 완전 돔구장을 건설하기로 발표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척스카이돔은 대지가 58,992㎡, 건축물이 29,120㎡로 연면적 83,578㎡이다. 지하2층에 지상4층으로 관람석이 16,784석으로 문화 및 집회시설(관람장), 운동시설, 판매시설, 근린생활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야구장은 물론, 훌륭한 공연장의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다.
고척스카이돔에서 그동안 했던 공연으로는 아이돌 가수들의 콘서트와 팬미팅 그리고 방송사의 가요대전 등이 있다. 개장 후 처음 2015년 10월 EXO가 막을 열었으며 2017년 11월과 2018년 7월에도 EXO는 두 차례 더 콘서트를 했다.
2016년 11월, 2017년 2월과 12월, 2018년 1월에는 방탄소년단의 콘서트와 팬미팅이 있었고 빅뱅은 2017년 1월과 12월에, 그리고 2019년 9월에 H.O.T.의 콘서트도 여기서 있었다.
또한 2015년 12월 KBS 가요대축제가 있었고 2017년 12월, 2018년 12월, 2019년 12월 등 세 차례의 SBS 가요대전이 있었다. 2020년 1월에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유명세를 탄 그룹 ‘퀸’이 내한공연을 하기도 했다.
유명 아이돌 가수들의 잇따른 공연으로 고척스카이돔은 10대와 20대 청소년들이 많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가수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커다란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메고 온 청소년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물건을 팔고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던 장터골이 요즘은 야구경기나 공연 관람 전후 사람들이 북적대는 먹자골목으로 변신하여 번성하게 되었다.
영등포교도소⦁영등포구치소
고척동에는 영등포교도소와 영등포구치소가 있었다. 이 자리에 1949년 12월 27일 부천형무소를 개청하였는데 1961년 12월 23일 부천교도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당시에는 이곳이 부천군에 속했기 때문에 명칭에 부천이 들어간 것이다. 1963년 1월 1일 서울시로 편입되어 영등포구가 되고 난 후 5년이 지난 1968년 9월 18일에서야 영등포교도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영등포교도소가 있던 지역은 일제강점기 때 야산이었으며 ‘고바야시’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소림광업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군수공장인 제련소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징용을 면제해줬다고 여기서 일을 했던 어르신은 당시를 회고했다. 이 공장은 해방이 되고 난 후에 폐업했다고 한다.
영등포교도소는 2011년 5월 4일 다시 서울남부교도소로 명칭을 변경하고 나서 같은 해 10월 29일 구로구 관내 천왕동으로 이전하였다. 교도소와 구치소 등 교정시설이 이전하기까지는 지역주민들의 지속적인 이전요구 민원과 구로구의 노력이 있었다. 구로구와 법무부의 수많은 협의를 거쳐 2007년 11월 교정시설 이전 합의각서가 체결되면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구로구는 교정시설 이적지를 개발하기 위하여 2,200여 세대의 아파트와 대규모 점포, 공공기관 복합청사 등의 건설과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2018년 11월 공사를 착공하였다. 이들 사업은 2022년 6월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기 과정을 거쳐2023년 초 공사가 완료되었다. 같은 해 3월부터 공동주택 입주가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쇼핑몰과 대형마트 등도 영업을 하고 있어 사람들로 붐비는 지역이 되었다.

▶교정시설이 이전하고 난 후 개발된 현재 모습
교도소는 범죄자 중 자유형(징역·금고·구류 등)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다. 구치소는 법률형사피의자 또는 형사피고인으로서 구속영장에 의해 구속된 사람을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수용하는 시설을 뜻한다.
영등포교도소와 영등포구치소에서는 수많은 수형자들이 옥고를 치루고 나갔다. 외부와 단절된 채 갇혀 있는 몸과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심신이 피폐해졌을 수감생활 중에도 유종순은 꿈을 내려놓지 않고, 꿈을 낳는 시를 썼다.
유종순은 흔히 말하는 58년 개띠로 한성대 국문과에서 수학하였다. 이른바 1980년 5월 ‘서울의 봄’ 때 시위를 하다 영등포교도소에 잡혀 들어갔다. 출소 후에 시집을 내고 제목을 ‘고척동의 밤’으로 지었다. 그 시집에는 ‘고척동의 밤’과 ‘고척동의 눈’ 등 60편의 시가 실려 있다.
고척동의 밤 유종순
어둠은 소리를 낳고 소리는 침묵을 낳는 밤 우리는 꿈을 낳는다
빛 혹은 하얀 새를 낳는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정신이 반쯤 돈 옆방의 탈옥수 정씨도 쇠창살 너머 얼굴이 두 토막 난 달도 하루종일 내장을 도륙당한 붉은 산도 신음소리 밑으로 꿈을 낳는다 새 살이 돋는 꿈을 낳는다
꿈은 좋은 것 허기져 앓는 밤에는 정말 좋은 것 온몸을 휘어감은 생의 아픈 상처보다야 훨씬 좋은 것 자유에 허기져 앓는 나도 꿈을 낳는다 거친 황토의 꿈을 낳고 미친바람의 꿈을 낳고 풍만한 여인의 꿈을 낳고 탈옥수 정씨의 꿈을 낳고 미친 듯이 싸잡아 마구 꿈을 낳는다
꿈은 정말 좋은 것 상처뿐인 우리는 밤새껏 끙끙 앓으며 그렇게 꿈을 낳는다
빛 혹은 하얀 새를 낳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