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5. 지명(地名)따라 시간여행 — 구로구(고척동편)
  • 차도연 기자
  • 등록 2024-10-15
  • 수정 2024-11-04
기사수정
  • 고척동(高尺洞) -⓵

고척동 지역 약사(略史)

 

고척동은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 수탄면 고좌리(富平都護府 水呑面 高座里)였다.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 337군으로 개편될 때 인천부(仁川府) 부평군 수탄면이 되었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 다시 경기도에 속하는 부평군 수탄면으로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부평군과 인천군(府內面과 多所面을 인천부로 하고 남은 지역) 일부를 합쳐 부평의 부(富)자와 인천의 천(川)자를 따서 부천군(富川郡)으로 개편할 때 부평군 수탄면 고좌리(高座里)를 부천군 계남면(桂南面) 고척리로 칭하였다. 계남은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있는 계양산(해발 395.4m)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또한 1931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05호에 의해 계남면이 소사면(素砂面)으로 바뀌었으며 1941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253호로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고척리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시 지역 확장으로 부천군 소사읍 일부가 서울시에 편입될 때 고척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고척동이 되었다. 

 

새로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서울특별시 조례 제276호에 의해 동일자로 영등포구에 5개의 출장소를 신설하였는데, 이때 고척동은 오류출장소(梧柳出張所)에 속하였다. 1968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491호에 의해 오류출장소가 폐지되면서 영등포구의 직할 동이 되었다, 

 

1978년 10월 10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1286호에 의해 고척1동과 고척2동으로 분동이 되었으며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 구로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땅이름 이야기

 

서울지명사전에 따르면 고척동의 동명은 이곳 마을이 높은 곳에 생긴 마을로 고좌리(高座里)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또 이 동네는 경기도의 부천, 안양, 김포, 그리고 강화 사람들이 서울지역 사람들과 안양천을 경계로 생필품과 농산물을 교환하여 오던 곳으로 당시 계량기가 없어 교환 측정 기준이 곤란하여 긴 자(高尺)로 재서 측정하던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안양천과 가까이에 있는 동양미래대학 아랫동네를 장터골이라고 했던 것으로 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이 섰을 것으로 짐작이 되나 긴 자(高尺)로 잰 데서 동명이 유래했다고 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고(高)자는 거의 다 높다는 의미로 쓰이지 길다는 뜻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 장텃골 지역(고척1동)


고좌(高座)는 높을 고, 자리 좌로 높은 자리 즉, 높은 곳에 있는 마을로 풀이가 된다. 고좌리는 지금의 고척1동 내 고척초등학교 일대에 있던 마을로 고잘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고척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좌리의 음이 변하여 고잘이 되고 또 고자리로 변하였으며 자를 한자화 하면서 자 척(尺)으로 쓰면서 고척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땅이름의 한자화는 신라 경덕왕(742년~765년) 때 쇠퇴해 가는 왕권을 회복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최초로 시행되었는데 조선조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오면서 굳어졌다.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에도 고척리(高尺里)가 있다. 평야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농촌마을이다. 중부고속도로 이천휴게소와 한국관광대학 주변에 있는 마을로 양각산(381.5m) 자락에 있다. 양각산의 고개 밑에 있어 생긴 땅이름으로 고잣말이라고도 한다. 고잣말은 고자리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두 곳의 다른 지역에서 불리는 고척이라는 땅이름의 유래나 변천 과정을 볼 때 사는 곳은 달라도 대개 사람들의 생각이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고좌가 고잘이나 고자가 되었고 또 고척으로 바뀌어 고척리와 고척동이 된 것이다. 

 


 

영등포쪽에서 경인로를 따라 신도림역과 구로역을 지나면 구로구를 동서로 갈라 놓은 안양천을 만나게 되는데 이 안양천을 가로질러 고척교가 놓여있다. 이 다리를 건너야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을 지나 부천, 인천까지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고척교는 구로1동 636번지와 고척1동 62번지 사이에 있으며 처음에는 길 203m, 폭 37.5m로 1970년 1월에 준공되었다. 이후 고척동에 고척돔구장을 건설함에 따라 주변 교통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폭을 15m 더 늘려 왕복 8차선으로 확장하였으나 여전히 차량 정체 현상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고 있는 실정이다. 

 

▶고척교(高尺橋)


이 다리는 서울과 인천을 왕래하는 주요 도로이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도 있었다. 지금의 위치가 아니고 북쪽 즉, 양천구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온 곳이었다고 한다. 시멘트와 돌을 섞어서 만들어 작고 낮아 돌다리 같았으며 겨우 양쪽으로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정도였다고 지역 어르신들은 기억하고 있다.

 

서울~인천 간, 서울~부산 간 국도가 1958년도에 완전히 포장되었다고 하며 고척교가 1970년에 준공된 것으로 봐서 이전 설치 과정과 몇 차례의 확장공사를 거쳐 지금의 교량 규모가 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고척교는 고척동의 지명을 따서 고척교라고 지은 것이다. 예전에는 개봉동지역에 있던 개천인 가린열이 안양천까지 흘러와 합류되므로 이를 따서 가린열다리라고 불렀다. 이후 가린열을 한자화 하여 갈탄교(葛灘橋)라고 하였는데 갈(葛)자를 만(萬)자로 잘못보고 만탄교(萬灘橋)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고척교에서 본 안양천(安養川)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금천현」 편에 ‘대천(大川)이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며 과천현의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의 철곶포(鐵串浦)로 흘러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것이 지금의 안양천임을 알 수 있다. 

 

안양천은 의왕시의 백운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군포시, 안양시, 광명시를 거쳐 금천구,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 등을 지나 성산대교 서쪽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안양천 대부분은 물이 깨끗했으며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60년대 안양천(고척1동 옛사진전-이순이)

 

안양천의 길이는 디지털광명문화대전에 32.5㎞, 디지털구로문화전자대전과 두산백과에는 34.8km, 문화원형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서울지명사전 등에는 35.1㎞로 나온다. 짧게는 0.3km, 길게는 2.6km까지 차이가 나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 건지는 알 수가 없다. 구로구 구간을 지도상에서 측정해 보면 약 3km 남짓 된다.

 

우리나라의 하천은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불렸는데 금천구 구간은 대천(大川, 한내)이라고 했다. 금천구의 토박이 어르신들은 지금도 안양천을 한내로 부르고 있다. 

 

양천구 목1동과 영등포구 양평1동 사이에서는 내의 모양이 오목하다 하여 오목내라고 하였고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 부근을 철곶포(鐵串浦)라고 하였다. 오목내에 있는 다리 이름은 오목교이다. 곶(串)은 삼면이 바다, 강 또는 호수 등 물로 둘러싸여 길게 튀어나온 땅을 이르는 말로 철곶포는 지금의 양평2동과 한강이 만나는 뾰족한 지점일 것으로 추측이 된다.

 

안양천(安養川)의 양자는 한자로 기를 양(養)으로 쓰고 있는데 여지도서의 「과천현」 편에는 안양천(安陽川)의 양이 볕 양(陽)자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발원지도 자료에 따라 관악산, 청계산, 백운산 서쪽, 청계산 서남쪽, 삼성산 등 여러 개로 달리 나온다. 한자 이름이 언제 어떤 연유로 바뀌었는지 또 정확한 발원지는 어디인지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0
유니세프
국민신문고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