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웅산은 오류동역 남측에서 구로구와 광명시의 경계를 이루는 목감천 인근까지 이어진 해발 126m의 산으로 개봉2동·개봉3동·오류2동·천왕동에 걸쳐 있다. 개웅(開雄)은 열 개(開)자와 수컷 또는 우두머리 웅(雄)자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보면 마을의 지형이 움푹 들어간 관계로 난리가 날 때마다 총탄이 개웃개웃 피해 가서 개웅마을이라 불렀고 산 이름도 여기에 유래해서 개웅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는 ‘개웃개웃’이 북한어로 분류되어 있고 뜻도 ‘고개나 몸 따위를 이쪽저쪽으로 자꾸 귀엽게 조금씩 기울이는 모양’이라고 되어 있다. 또 표준국어대사전에 ‘개웃’이 고개나 몸 따위를 한쪽으로 귀엽게 조금 기울이는 모양이라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유래와는 부합되지 않는다. 이 산의 남동쪽 자락이 개웅마을이었으며 지금의 개봉3동이고 북동쪽 자락은 천신마을이었고 개봉2동이다.
▶천신아파트(개봉2동 천신마을)
천신(天神)마을
천신마을은 진주 강씨 집성촌이었다고 하며 마을 근처에 흐르던 개울을 천신내깔이라고 했다. 천신내깔과 개봉1동쪽의 가린열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천신마을에는 ‘천신’ 이라는 이름을 쓰는 아파트가 있으며 ‘가린열북카페’라는 카페도 있었다. 이들은 개봉1동 가린열마을이라고 불리던 지역에 있는 가린열공원과 함께 옛 땅이름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해준다.

▶가린열북카페(개봉2동 천신마을)
천신마을 앞에 있던 벌판을 천신앞벌이라고 했으며 천신마을 뒤의 개웅산을 천신뒷산이라고 하였다. 천신뒷산에는 개웅산 봉수대가 있었는데 3·1운동 당시 이곳에서 주민들이 봉화를 올렸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최소한 100년 전까지도 봉수대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봉수대(烽燧臺)는 국방과 통신을 위한 국가의 중요 시설로써 밤에는 횃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정보를 전달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남북 변경에서 시작하여 서울의 남산(목멱산)에까지 도달이 되도록 운영하였다. 조선시대의 봉수방법은 평상시에는 1홰(횃불이나 연기의 숫자), 적이 나타났을 때는 2홰, 적이 국경 가까이에 오면 3홰, 적이 우리나라 땅에 쳐들어 왔을 때 4홰, 적과 교전이 이루어지면 5홰를 올렸다고 한다.

▶남산봉수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봉수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13세기)라고 한다. 봉수는 봉과 수를 합친 말로 전달수단에 따라 봉은 밤에 불로 수는 낮에 연기로써 알리는 방법이다.
봉수는 을묘왜변이나 여진족 이탕개(尼蕩介)의 난, 임진왜란 등이 일어났을 때 전혀 보고가 되지 않아 유명무실 해졌다. 임진왜란 중인 1597년 5월 한준겸(韓浚謙)의 건의에 따라 명나라의 제도를 본떠 만든, 연락병이 말을 타고 달려 공문서를 전달하는 파발제(擺撥制)가 등장하였다.
봉수는 경비가 덜 들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전달할 수 없어 군령 전파가 어렵고 비, 구름, 안개 등 날씨가 좋지 않으면 판단이 곤란하고 중도에 끊어지는 등의 결점이 있었다.
반면에 파발은 경비가 많이 소모되고 봉수보다 전달속도가 늦은 결점이 있으나 문서로써 전달되기 때문에 보안유지는 물론 적의 병력 수, 장비, 이동상황, 아군의 피해상황 등을 상세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파발제는 관리들의 사적인 이용, 국가기밀 누설 등의 폐단을 초래하였다.
개웅산 봉수대는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중요한 통신기능을 담당했던 시설이므로 현재까지 보존되었다면 상당한 가치를 인정받았을 것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그 터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요즘도 이 지역 주민 중에는 개웅산을 봉화대(烽火臺)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가린열교(가린열다리)
개봉사거리에서 광명시로 가는 개봉로 동쪽에 2000년 초 현대건설에서 지은 3,500여 세대 정도의 아파트단지가 있다. 이 일대가 예전에는 습지였다고 한다. 이 아파트단지와 남부순환로 사이에 개봉유수지생태공원이 있어 이 지역이 습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가린열교는 개봉2동 현대아파트 옆에서 고척동 남부순환도로에 걸쳐 길이 120m, 폭 10m 정도의 개화천 위에 건설된 다리로 2002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이 다리 이름은 인근지역에 있는 가린열마을에서 유래되었으며 가린열다리 또는 간열다리라고도 한다.
▶가린열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