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궁동(水宮洞) -⓷
궁동(宮洞)
궁동은 온수동이 1963년 이전까지 온수리로 불린 것처럼 궁리로 불렸던 곳이다. 궁동과 온수동은 둘 다 법정동이고 두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데가 행정동인 수궁동이다.
법정동이란 이름 그대로 법에 정한 동이라는 뜻으로 대부분 옛 부터 전해져 온 고유지명을 따라 썼으며 1914년 시행된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정해졌다. 신분증이나 금융 또는 재산권과 관련된 공부의 주소에 사용된다.
반면 행정동은 주민들의 거주지역을 행정상의 편의에 의하여 설정한 행정구역의 단위이다. 관할구역의 면적보다는 주로 주민 수의 증감에 따라 설치되거나 폐지되기도 한다. 행정동에서 각종 공부의 관리와 민원서류 발급, 주민의 민원사항 처리 등 행정 서비스를 맡아서 제공한다. 따라서 오류동이 법정동이고 오류1, 오류2동이 행정동인 것처럼 궁동, 온수동이 법정동이고 수궁동은 행정동인 것이다.
궁동과 온수동은 경인 전철과 나란히 가는 부일로의 우신중고등학교 입구 삼거리에서 서울정진학교 앞까지 이어지는 부일로9길을 경계로 동쪽은 궁동 서쪽은 온수동으로 나뉘어졌다. 1970년대 후반에 온수연립주택단지(현 온수힐스테이트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버스가 다닐 수 있는 차도가 개설되었다.
지금의 부일로9길인 이 차도의 개설로 우신중고등학교의 교사는 궁동, 운동장은 온수동으로 나누어졌다. 당시 학교 측에서 행정구역을 일원화 시켜달라는 민원을 제기함에 따라 서울시에서 이를 받아들여 1985년 교사와 운동장 모두 궁동으로 편입시키는 조치를 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동쪽의 우신중고등학교와 서쪽의 온수초등학교 사이로 난 도로인 부일로9길을 기준으로 궁동과 온수동의 경계가 조정이 된 것이다.

▶부일로9길(좌측 온수초교, 우측 우신중고교)
<땅이름 이야기>
궁동의 이름은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와 후궁인 정빈 여흥 민씨의 일곱째 딸 정선옹주(貞善翁主)가 이 지역에 살던 권대임(權大任)에게로 시집와 궁궐 같은 큰집에서 살았다고 하여 궁골로 불린데서 유래하였다. 궁골이 궁말, 궁리로 그리고 궁동이 된 것이다.
정선옹주의 남편 권대임은 예조판서를 지낸 충정공(忠貞公) 권협(權挾)의 손자로 상당한 재력이 있어 집이 궁궐처럼 크고 화려하여 인근 주민들이 이곳을 궁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옹주가 시집간 집이니 일반 민가보다 크기는 했겠지만 집의 크기보다는 왕가의 자손이라 예우하는 차원에서 궁마을로 불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울지역에는 궁마을 또는 궁말이 여러 곳 있었는데 강남구 수서동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지역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묘역이 있는 곳으로 지금도 그 후손들이 묘역을 관리하면서 살고 있다. 이제는 아파트단지를 비롯한 주택가로 변모했지만 이곳 출신인 필자는 지금도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끼리는 궁말이라는 옛 지명을 쓰곤 한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서울시 중구에 있는 소공동(小公洞)이다. 소공동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집이 있어 속칭 작은공주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소공동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조선군사령관이었던 일본인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거주했다고 해서 장곡천정(長谷川町)이라고 했다가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구 제도(區 制度)가 시행되면서 중구 장곡천정이 되었다. 해방이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정비할 때 우리 식 동명인 소공동으로 바꾸었다.
선조는 출가한 정선옹주에게 궁동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조선시대에 국왕이 신하나 종친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려줄 때 또는 공이 있는 향리에게 향리의 역을 면제해줄 때 내리는 문서를 사패(賜牌)라고 하며 이때 주는 토지를 사패지라고 한다.
사패지는 보통 당대 혹은 2~3대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했지만 대부분 기한이 지나도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패지의 면적에 대해서는 사방으로 십리 또는 밤에 촛불을 켰을 때 그 불빛이 비치는 곳 모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방십리는 16㎢(480만평)로 여의도의 면적 2.9㎢(약 87만평) 보다 5.5배 이상 넓은 것인데 이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밤에 촛불을 켜면 날씨나 현장 상황에 따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가 있다. 이를 근거로 면적을 추산하면 다른 공신들이 받았다는 사패지 면적과 대동소이 하다고 한다. 공신의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촛불이 보이는 곳까지 토지를 주었다는 설이 사실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선옹주가 시집와 살았다는 옹주궁은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가 들어선 자리이다. 학교 정문에서 안쪽으로 수십 미터쯤 들어가면 궁골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는 『궁골(宮谷) 조선조 제14대 선조대왕의 7녀 정선옹주(貞善翁主)가 이곳 안동권씨가로 출가하여 옹주궁이 있었던 곳임(현재 좌측 능선에 옹주 묘소가 있음)』이라고 새겨져 있다.

▶궁골 표지석(서서울생활과학고교 내)
어느 안동 권씨 후손은 집안 어른들에게서 옹주궁이 700 평쯤의 대지에 50칸 규모의 집이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때 가족들이 피난을 갔다가 왔더니 그 사이 집이 다 타 버렸다고 어른들이 무척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의 전신은 동광상업고등학교로 1972년에 개교하였다. 주민들에 따르면 정선옹주가 살던 집터는 학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밭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서서울생활과학고교(좌측 산자락이 정선옹주 묘역)
정선옹주는 선조 27년인 1594년에 태어났다. 권대임은 정선옹주보다 한 해 뒤인 1595년에 태어나서 한 살이 적다. 두 사람은 1604년에 혼인을 하였는데 우리 나이로 권대임이 열살, 정선옹주가 열한 살 때이다. 옹주는 스무 살이 되서야 득남을 했지만 아들을 제대로 키워보지도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권대임의 본관은 안동이며 예조판서를 역임한 권협(權悏)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우의정을 역임한 길흥군(吉興君) 권신중(權信中)이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7세손인 이정필(李廷弼)의 딸이다. 이런 집안 배경이 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게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권대임은 정선옹주 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1645년(인조 23년)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무덤은 궁동 산1-66번지 안동권씨 묘역에 있으며 합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부마 즉, 임금의 사위는 재혼을 금지했기 때문에 권대임은 정선옹주 사후에도 혼자 살 수 밖에 없었고 아들 하나 밖에는 두지 못했다.

▶권대임 정선옹주 부부 묘
권대임의 묘 동쪽에 있는 권대임 신도비에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기예가 숙성하고 특히 글씨를 잘 써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 입장에서는 다른 신하보다 사위인 권대임이 훨씬 더 어여쁘게 보였을 것이다.
묘역 제일 위가 권대임의 할아버지인 길창군(吉昌君) 충정공(忠貞公)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무덤이다. 그 아래에 부마도위(駙馬都尉) 길성군(吉成君)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무덤이 있고 또 그 아래에 아버지 길흥군(吉興君) 권신중과 부인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무덤이 있다. 그 아래는 권대임의 외아들 권진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의 묘이다. 권대임과 아버지 권신중의 무덤은 위아래가 바뀌었는데 이는 권대임이 임금의 부마 신분이라 그 입장을 존중하여 이를 반영해서 조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동권씨 묘역
묘역 아래 궁동생태공원 남단 주변에 권협 등의 신도비가 있고 묘역 내에도 신도비 외에 묘비 등이 다수 있어 당시 묘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을 비석이 많이 서 있다고 해서 비석거리 또는 비선거리(비성거리)라고 했다.

▶비석거리(궁동생태공원 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