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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지명(地名)따라 시간여행 구로구 (수궁동편)
  • 차도연 기자
  • 등록 202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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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궁동(水宮洞) -①

 

<수궁동 약사(略史)>

 

수궁동 지역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시의 행정구역을 확장하기 위해 부천군 소사읍 일부를 서울시에 편입할 때 부천군 소사읍에 속했던 궁리, 온수리, 항리가 서울시로 들어오면서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같은 날 서울특별시조례 제275호에 의해 수궁동이 설치되어 궁동, 온수동, 항동 일원을 관할하였다. 수궁동의 동명은 온수동(溫水洞)의 ‘수’자와 궁동(宮洞)의 ‘궁’자를 하나씩 따서 만든 것이다. 

 

▶수궁동 옛 지명 마을지도


1968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491호에 의해 오류출장소가 폐지되면서 이 지역은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0년 5월 5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해 수궁동은 폐지되고 오류동에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궁동과 온수동은 천왕동, 항동과 함께 오류동의 관할로 들어갔다.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구 될 때 오류동 지역은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88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구로구조례 제59호에 의해 오류동에서 수궁동을 다시 분동하고 궁동과 온수동을 관할하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궁동주민센터(오류동에서 분동된 다음 해 준공)

 

 <땅이름 이야기>

 

온수동(溫水洞) 

 

온수동의 예전 명칭은 온수리로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부르던 이름이다. 옛날 이 일대에서 따뜻한 물이 나와 온수골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으며 동네가 형성되면서 온수리, 온수동이 된 것이다. 전국에는 따뜻한 물과 관련 지어 마을 이름에 온수, 온천, 온정 등의 글자가 들어 간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온수동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 수탄면 온수리였다.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온수리는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仁川府 富平郡 水呑面)이 되었다. 다음해인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 경기도에 속하는 부평군 수탄면 온수리가 되었다. 

 

그리고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부평군 수탄면 온수리가 부천군 계남면(桂南面) 온수리로 되었다. 또한 1931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05호에 의해 계남면이 소사면(素砂面)으로 바뀌었고 1941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253호에 의해 다시 소사읍 온수리가 되었다. 

 

이 동네에 전해오는 말로는 수백 년 전에 이 지역에서 온수가 나왔다고 하는데 어느 지점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온천개발을 위해 온수리 일대를 파 헤쳤지만 수맥을 찾는데 실패하였다고 한다. 

 

▶온수동 초운교회(이 일대에서 온천 시추를 했다는 설이 많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온천개발이 시도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에는 한 온천개발업자가 산자락에서 온수를 발견했지만 이 일대가 그린벨트 지역인데다 지하철 7호선 구간에 저촉되어 사업을 계속 추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온천법에 따르면 온천은 지하로부터 솟아나는 섭씨 25도 이상의 온수이어야 한다. 지금도 온천개발이 되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주민들이 있다. 


▶온수경로당(뒷편 공원 일대에서도 온천 시추를 했다는 주장이 있다) 

 

<문헌에서 본 온수골>

 

안질과 피부병으로 시달렸던 세종대왕은 온양온천을 다녀온 후 효험을 보고나서 한양 근처에서도 온천이 나오기를 무척 기대했으며 그에 대한 집착도 강했던 것 같다. 세종실록에 온천을 찾는 내용과 부평도호부와 관련된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당시 부평도호부 관할 지역이던 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부평구, 서구 그리고 부천시 관내에는 온수, 온정, 온천 등의 지명이 없는 것으로 봐서 실록에서 찾은 부평의 온천지는 지금의 구로구 온수동인 게 맞는 것으로 보인다. 

 

세종 16년에 봉상소윤(奉常少尹) 이사맹(李師孟)을 부평 등지에 보내 온천을 찾아보게 하였고 세종 20년에는 사재감정(司宰監正) 이사맹과 경기경력(京畿經歷) 권준(權蹲) 보내 역군 2백 명을 데리고 땅을 파서 찾았으나 열흘이 지나도록 찾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사맹이 부평의 아전과 품관들이 온정(溫井)의 소재지를 정직하게 말하지 않아 조사하기가 어렵다고 보고하자 즉시 의금부에 명령하여 전 판사(判事) 남급(南汲)과 향리(鄕吏) 김우(金雨) 등 5인을 국문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83권(세종 20년-1438년) 10월 4일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조(吏曹)에 전지하기를, 

 

"온수(溫水)가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데 자못 신비로운 효험(効驗)이 있으므로 내가 이를 구하는 것은 실로 백성을 위하는 것이요, 옛 사람들이 신선을 구하는 뜻과는 다르다. 부평부에 온수가 있다는 것은 비단 중외(中外)가 떠들 뿐만 아니라 그 고을 사람들도 역시 그 실정을 숨기지 못하나 단지 그 소재처를 분명히 말하지 아니할 뿐이다.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으나 관료나 아전이나 백성들이 나의 뜻을 몸 받지 아니하고 혹시 장래에 번거롭고 소요스러운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같은 말로 은휘(隱諱)하니 횡역(橫逆)됨이 심한 것이다. 이제 만약 전처럼 굳이 숨기면 고을의 명칭을 깎아 내려서 그 죄를 징계할 것이요, 만일 다른 고을 사람이 신고하는 경우에는 영영 명칭을 회복시킬 리가 없을 것이니 이런 사의(事意)로써 공문을 보내어 효유하게 하라." 하였다.


▶세종대왕실록(박영규 저)

 

그리고 세종실록 83권(세종 20년-1438년) 11월 8일 자에는 이렇게 나온다.

 

『부평부(富平府)를 강등하여 현(縣)으로 하였다. 임금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번 조관(朝官)을 보내어 찾아보았으나 아전과 백성이 숨기고 말하지 아니하므로 깎아 내려서 현으로 삼은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집무에 지장을 덜 받기 위해 한양과 가까운 온천에서 질병을 고쳐보고자 기대했던 듯하다. 이런 기대감에 대한 실망이 부평부(府)를 현(縣)으로 강등시킨 이유가 아니었나 하고 짐작해 본다.

 

세종 21년에는 경기 경차관(敬差官) 이사맹이 부평 아전이 온정을 감추고 고하지 않은 죄를 물어 함길도 4진(鎭)으로 보내기를 청하는 대목도 있다. 이사맹이 부평 사람들과 아전들은 왕명(王命)을 두려워하지 않고 ‘굳게 숨긴다면 영영 수고하고 소요스런 폐해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고하였다. 

 

이후 세종은 각 고을에서 온천을 찾아내 고하는 자는 상을 주고 감추거나 고하지 않다가 뒤에 드러나게 된 자는 그 죄상을 중하게 논죄할 것을 각 고을에 알아듣도록 타이르라고 명하였다.

 

온천이 들어서면 피부병 환자들이 많이 몰려들게 되고 사용한 온천수가 논밭에 스며들어 농사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아전과 백성들은 따뜻한 물의 근원을 숨겼다고 민간에서는 전해져 왔다. 

 

고을 곳곳을 수백 군데나 파봤고 여러 명이 국문을 당했으며 아전들을 함길도로 보내버렸는데도 끝까지 온천을 찾지는 못하였다. 임금이 더군다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이 여러 차례나 왕명을 내리고 벌을 주었음에도 백성들이 감추고 알리지 않았다는 점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온천수 나오는 곳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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