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동(梧柳洞) -⓸
<땅이름 이야기>
주막거리
주막이 있던 데라서 이름이 붙은 주막거리는 전국에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있다. 주막거리는 거리 이름이자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오류동주막거리는 경인로와 오리로의 오류고가도로가 교차하는 사거리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오류2동 지역이다.
오류동주막거리는 인천 제물포와 서울의 중간 지점쯤 되는 지역으로 옛날에는 주막과 함께 관리나 사신들의 숙식을 제공하던 객사가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인천에서 서울까지는 100리길로 서울에서 인천을 가든지 인천에서 서울을 가려면 점심 때쯤 오류동 주막거리에 도착하기 때문에 식사는 물론, 숙박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주막들이 생겨나고 성업하게 되면서 주막거리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북 예천 낙동강변의 삼강나루에 삼강주막이 있었다. 이곳은 장사꾼과 길손들로 항상 붐볐다고 하는데 2004년 우리나라 마지막 주모로 불리는 유옥연 할머니가 별세(당시 90세)하면서 폐가가 되었다. 이후 예천군에서 주막을 복원하고 이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이처럼 예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는 주막이 생겨나거나 장이 들어서기 마련이었다.

▶예천 삼강주막(출처-경북나드리 블로그)
주막(酒幕)은 주가(酒家), 주포(酒舖) 또는 주사(酒肆)라고도 불렸다. 요즘으로 치면 술집과 식당, 그리고 여관을 겸한 업소로 볼 수 있다.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업소인 것이다.
옛날 주막에 대한 야사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세종조 상신편(世宗朝 相臣編)에 실려 있다. 조선 초 정승 맹사성(孟思誠)의 유명한 일화로 ‘공당문답’이라고 전해지는 이야기다.

▶연려실기술(이긍익)
<<맹사성이 고향 온양에서 한양 가는 길에 용인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주막에 먼저 들었던 시골 양반이 허술한 맹사성을 깔보고 수작을 걸어왔다. 그가 ‘공’ 자와 ‘당’ 자를 말끝에 붙여 문답을 해서 막히는 쪽이 술 한턱을 내기로 하자고 제안을 했다.</p>
맹사성이 먼저 “무슨 일로 서울에 가는공?” 하자 그 시골 양반이 “과거 보러 간당.” 하였고 “그럼 내가 주선해 줄공?” 하니 “실없는 소리 말기 당.” 하였다.
며칠 뒤 한양의 과거장에서 맹사성이 그를 보고 “어떤공?” 하였더니 맹사성을 알아본 그의 낯빛이 하얘지면서 “죽어지이당.” 하였다.>>는 것이다.
맹사성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개항 이후에 오류동주막거리에는 제물포와 서울을 왕래하는 일본군과 청나라군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많이 지나가게 됨에 따라 외국 사신이나 고위 관리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객사가 생겼다고 한다.
‘주막거리 객사’로 추정되는 집이 1994년까지 당시 동부제강 사원연수원 아래쪽에 있었다. 이 객사는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안채와 행랑채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류주막거리 객사 과거 모습(사진-구로구청)
동부제강 사원연수원 자리는 지금 골프연습장으로 바뀌었는데 이곳에 구로구청에서 1994년 주막거리 객사 명소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여기에는 <서울과 제물포의 중간 지점으로 청일전쟁 이전에는 청국 사신이나 고위 관리가 쉬어 가던 객사였으며 이 근처에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던 자리임>이라고 새겨져 있다.

▶주막거리객사 표지석
객사(客舍)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며 사설업소인 주막과 달리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가 운영한 숙박시설로 관리가 파견되었다. 외국 사신이나 중앙과 지방의 관리가 왕래할 때 묵어가던 곳이다.
한때 구로구청에서 수궁동 입구 삼거리 오류철도고가차도 한편에 오류골 주막거리 객사를 복원, 설치했던 적이 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구로구에서는 2023년 4월과 2024년 5월 두 차례 오류골 주막거리 객사를 재현하여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할 수 있는 전시마당, 공연마당, 장터마당, 체험마당 등 다양한 즐길거리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로 오류동역 광장에서 ‘주막거리 객사전’을 개최한바 있다.
<지역 이야기>
오류주모
주모란 술청에서 술을 파는 여인이라고 사전에 되어 있지만 술뿐 아니라 음식도 팔았다. 1999년 3월 5일 조선일보에 실린 이규태의 역사 에세이 ‘100년의 뒤안길에서(경인철도편)’를 보면 오류동 주모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자가 넉살이 좋으면 오류동 주모냐고 빗대곤 했다. 경인간을 걸어 다닐 무렵 오류동은 이별하고 마중하는 목으로 주막이 꽤나 발달했고 주모의 파워도 따라서 거세져 넉살도 상승했음직하다.</span>
경인철도를 개통하면서 주막 손님이 격감하여 주모들이 악에 받쳐 있는 어느 날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기차 정거장에 풍악과 창 소리가 들려왔다. 개통 초창기에는 기차 손님이 없었다.
이에 철도 회사에서는 철로변 장터에 「성주명기 앵금」, 「평양명기 초선」 하는 식으로 푯말을 꽂고 기생들을 성장시켜 풍악과 소리로 유객했는데 그 패거리가 오류에서 한판을 벌였다. 울분에 사무친 오류 주모들이 치마끈 졸라매고 작당하여 정거장으로 몰려가 기생들 머리채를 낚아채고 난투극을 벌인 것이다.>>
오류동은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숙식을 해결하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는데 이때 노자를 많이 쓴 사람에게 ‘오류주모에게 간 씹혔구나.’라고 하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류순정(柳順汀) 묘역
류순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지옹(智翁), 호는 청천(菁川)이다. 류순정은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는데 활을 잘 쏘아서 무인 중에서도 그와 견줄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1506년(연산군 12년) 이조판서일 때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켜 성공하였다. 이후 우의정, 영의정에 올랐다가 1512년 병사하였다.
오류2동 산43-31 일대에 진주류씨(晉州柳氏) 묘역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에 류순정의 묘와 그의 신도비가 있고 그 아래에 부인 안동권씨의 묘가 있다. 좌측으로 아들인 류홍(柳泓)의 묘와 신도비가 있고 그 아래로 후손들의 묘소가 들어서 있다.

▶류순정 묘역
이 중 류순정과 류홍의 묘는 서울시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다.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은 서울 지역에서는 유일한 부자 2대의 공신 묘역이다. 특히 류순정의 묘소는 고려와 조선 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조달·관리하던 관청인 장흥고(長興庫)에서 왕족에게만 내려 주던 관곽(棺槨)을 사용하여 당시 공신 묘역의 조성 방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