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이야기>
응골
오류동역 남쪽 개웅산의 북측 산자락에 있는 마을로 깊숙한 곳에 있어 응달이라 햇빛 드는 시간이 짧고 어두운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응달골이 줄어 응골이 된 것으로 응꿀이라고도 하였으며 오류2동에 속하는 지역이다.

▶오류마을에서 본 응골
응달골이나 응골보다는 응당말이 더 많이 쓰이는데 응달과 관련된 이같은 지명은 전국에 수십 군데나 있다. 응골과는 반대로 양지쪽에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양지말은 수궁동에도 있는데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양지말은 전국적으로 97개나 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것까지 따지면 이 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응골 뒤쪽의 개웅산 정상부에는 지금도 군의 관측소가 있어 이 일대는 고도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고층건물이나 고층아파트를 지을 수가 없는 지역이 되었다.

▶군 관측소(응골 뒤 개웅산)
<지역 이야기>
오류장(梧柳莊)
오류장은 오류동역 남쪽의 개웅산 북쪽 기슭인 응골에 있었다. 이 일대에서 온도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따뜻한 물이 나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요정을 지었다. 오류골의 이름을 따 오류장이라고 붙여 운영하였는데 조선총독부 고관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간의 길과 경인철도의 오류동역과 가까운 곳에 있어 교통 여건이 좋아서 서울 등지의 일반인들도 이곳을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오류장은 1932년 4월부터 1933년 7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장편소설 「흙」에도 열다섯 번이나 나오는 곳이다.
처음은 <<정선의 집 앞에 택시 하나가 와 닿은 것은 밤 새로 한 시쯤이었다. 그 자동차 속에서 나온 것은 물을 것도 없이 정선과 갑진이었다. 그들은 오류장에서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그리고 놀다가 막차도 놓쳐버리고 자동차를 불러 타고 경인가도를 올리몰아 이때서야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이다.
두 번째는 <<만일 술김이 아니었더면 남의 아내인 정선이가 오류장에서 갑진에게 몸을 허하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다.>>라고 나온다.
이것을 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오류장은 식사는 물론, 목욕을 하고 잠도 잘 수 있는 곳이었던 것 같다. 요즘의 유흥업소와 유사한 형태의 업소로 일반 남녀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오류장이 있었던 이곳은 6.25때 미군이 주둔하다가 이후 공군 2325부대가 들어서면서 그 흔적이 사라지게 되었다. 2003년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실제로 1971년 8월 23일 실미도의 북파공작원들이 부대원을 살해하고 실미도 부대를 이탈, 시외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를 향해 돌진하다가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자폭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생존자 4명에 대한 총살형이 1972년 이 공군부대에서 집행되었다, 이후 이곳 부대원들이 악몽에 시달리는 바람에 총살형이 있었던 사격장에 무명용사 위령비를 건립했었다고 한다.
공군 2325부대에서는 1983년 2월 25일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공군 이웅평 대위가 한때 복무했었다. 이 부대는 1991년 다른 곳으로 완전히 이전하여 사격장이나 위령비 등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지금은 그 자리에 평강제일교회가 들어서 있어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평강제일교회
오류애육원
오류애육원은 송석도(宋錫度)가 오류동 응골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보호하고 있던 6·25 전쟁고아들을 보다 나은 환경에서 보살피겠다는 신념으로 1951년 4월 25일 설립한 아동양육시설이다.
그는 원장이 되어 1952년 3월 본인의 땅 3,000평과 건물 300평을 출연하여 오류애육재단을 설립하였다. 2011년에 오류애육원은 사회복지법인 삼농복지재단 ‘오류마을’로 명칭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곳에는 현재 미취학 아동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50여명의 원생이 생활하고 있다.

▶오류애육원(삼농복지재단 오류마을)
송석도(1918~2001)의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충청남도 대덕군에서 아버지 송후용과 어머니 성낙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세 때인 1931년에 오류동에 정착하였다. 1928년 오류동에 들어와 교육자이자 종교가로 활동하면서 오류초등학교의 전신인 오류학원을 설립한 송두용이 그의 숙부이다. 송석도는 이러한 숙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34년 송석도는 소작농으로 자립경영을 시작하였고 1937년 영농과 함께 축산을 시도하였으며 1945년에 육우와 비육우 목장인 송농장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송농장에서는 주로 과채류의 촉성재배, 포도재배 및 가축을 사육하였는데 농장에서 생산된 농축산물은 영등포와 인천, 남대문뿐만 아니라 멀리 평양, 원산, 함흥, 만주에까지도 판매되었다고 한다.
송석도는 1949년 오류유치원, 1953년 오류중학원을 설립하여 어린이들을 교육하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 해에는 부천군 소사읍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지방자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1970년 오류동 ‘응골개발위원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71년부터 경기도 용인에 황무지 92,562.4㎡를 개간하여 삼애농원(三愛農園)을 조성하고 농장과 목장을 경영하였다.

▶송석도 생애 안내 일부(오류마을 기념관 내)
우리나라 농촌운동의 선구자인 성천(星泉) 유달영(柳達永) 박사는 1978년 오류애육원 창립 27주년과 송석도의 회갑을 기념하여 그에게 삼농(三農)이라는 호를 지어 선물하였다. 삼농은 평소 송석도의 신념인 <인간을 쓸모 있게 기른다. 식물을 무성하게 가꾼다. 동물을 비대하게 먹인다.>는 사람농사, 식물농사, 동물농사 등 세 가지 역점적인 농사활동에서 착안 한 것이라고 한다.
오류애육원은 예전 군부대 자리에 들어선 평강제일교회와 인접해 있다. 6·25전쟁 당시 미군이 이 지역에 주둔할 때 오류애육원의 대지 1,700여 평과 건물 100여 평이 강제 징발되었다고 한다. 후에 재단에서 이 재산을 되찾기 위해 군은 물론, 행정기관과 대통령에게까지 진정을 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오류애육원 측과 군, 행정당국, 평강제일교회의 전신인 대성교회 간에 수십 년 간 재산소유권 문제가 얽혀 갈등이 계속 되었다. 마침내 2001년 오류애육원이 교회 측에 매도하는 것으로 협의가 이루어짐으로써 해결되었다고 삼농복지재단 이형춘 이사장으로부터 이런 사정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1988년 어느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송석도는 37년 동안 자식 800명을 키웠다고 한 적이 있다. 그의 정신을 받들은 오류애육원과 오류마을 출신 원생들이 ‘잔디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송석도가 일생을 품어온 사람 사랑, 농작물 사랑, 그리고 가축 사랑을 인정한 사단법인 한국상록회는 그를 1991년 제6회 인간 상록수로 추대 하였다. 한국상록회는 한평생을 한 분야에서 쉼 없이 노력하고 연구하면서 사회에 기쁨과 보람을 주는 사람을 찾아 해마다 시상하고 있는 단체이다.
송석도가 세상을 뜬지 5년이 지난 2006년 7월 17일 오류애육원 본관 건물 앞에 ‘삼농 송석도’의 흉상이 세워져 오류애육원에서 시작하여 오류마을로 바뀐 이후에도 계속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

▶삼농 송석도 흉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