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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명(地名)따라 시간여행 구로구 (오류동편)
  • 차도연 기자
  • 등록 202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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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동(梧柳洞) -⓶

 

<지역 이야기>

 

오류출장소(梧柳出張所)

 

1963년 1월 1일 서울시의 행정구역을 확장할 때 새로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영등포구에 신동, 관악, 양동, 양서, 오류출장소 등 5개의 출장소를 신설하였다. 이때 오류동과 함께 개봉동, 고척동, 궁동, 온수동, 천왕동, 항동지역을 오류출장소에서 관할하였다. 

 

오류출장소는 현재 오류1동주민센터 자리와 그 옆의 오류동우체국 자리에 걸쳐 있던 건물에서 1968년 영등포구 직할로 편입될 때까지 이 지역의 행정업무를 처리했다고 한다. 

 

경인로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된 오류동은 1975년 10월 1일 경인철도를 기준으로 북쪽은 오류1동, 남쪽은 오류2동으로 나뉘어졌다. 경인로는 오류1동지역을 관통해서 오류2동과 수궁동 사이를 지나 부천을 거쳐 인천까지 가는 길이다. 

 

경인로의 본래 이름은 ‘경인간(京仁間)의 길’이었는데 경인철도가 부설된 1899년 이전에 만들어진 길로 서울과 개항지인 인천을 연결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길 중에서 인천항과 마포나루까지의 뱃길 외에는 우마차와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제일 큰 도로가 경인로였던 것이다. 당시 경인로의 폭은 1~2m 정도로 다른 곳의 도로 보다는 비교적 노폭이 넓고 도로의 상태도 나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인천 간은 100 리쯤의 거리로 빨리 걸어야 하루에 갈 수 있다. 그 시절 아침 일찍 인천에서 출발하면 점심때 오류동에 도착하기 때문에 이쯤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오류1동에 있는 오류동역은 철도개설 당시에는 수궁동 연세중앙교회 앞쪽의 경인로와 오류철도고가차도가 교차하는 지점 부근에 있었다가 191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오류철도고가차도 아래 철길(개통 당시 오류동역이 있던 곳)

 

이처럼 당시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데 편리했던 도로와 철도를 이용하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고 상권이 형성됨에 따라 오류동은 자연스럽게 이 일대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8~90년대 오류동역 주변에는 많은 유흥업소들이 있어 서울은 물론, 경기도 일대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한때는 카바레가 성업하기도 했다. 

 

오류초등학교

 

1967년에 개교한 고척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1970년대 초까지 오류동, 개봉동. 고척동, 항동. 천왕동, 수궁동 지역에 초등학교는 오류초등학교가 유일하였다. 이 지역 출신의 60대 중반 이상인 사람들 대부분은 오류초등학교 동문이라고 봐도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 

▶오류초등학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오류초등학교는 충남 대덕 출신의 송두용(宋斗用, 1904~1986)이 1928년 오류동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1930년 12월 3일 오류학원(梧柳學院)을 개원하여 주간에는 어린이, 야간에는 성인들을 교육하면서 시작한 것이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오류학원은 4년제였고 1936년에 6년제 오류학습강습회로 바뀌었다. 오류초등학교 인터넷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연혁에는 ‘1930년 12월 10일 오류강습회 개강’으로 나오는데 날짜와 명칭에 다소 차이가 있다. 이어서 1939년 4월 1일 오류심상소학교 인가, 1941년 3월 31일 사립 오류학교 인가, 1943년 5월 23일 오류공립국민학교로 인가와 동시 개교한 것으로 나온다. 오류국민학교는 당시 이 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초등교육기관이었다. 

 

1996년 3월 1일 비로소 지금 쓰고 있는 서울오류초등학교로 학교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는 초등학교란 명칭이 1941년 일제 칙령에 의해 만들어졌고 군국주의적 색채가 있다는 지적이 있어 법령의 개정에 의해 전국적으로 국민학교의 명칭을 변경한 데 따른 것이다.

 

오류학원 설립자 송두용은 1924년 3월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25년 동경으로 유학을 가 동경농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송두용은 1926년 한 집회에서 만난 유학생 유석동, 김교신, 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등과 함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27년 7월 1일 6인 동인지로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했다. 1942년 ‘성서조선’의 필화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어 1년 만에 출감한 일도 있다. 

 

송두용은 1946년 9월 오류유치원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1961년 2월에는 중등과정인 오류학원을 개교하였으나 3년간의 고투 끝에 폐교하고 말았다. 또한 그해 8월에는 오류문고를 개설하는 등 평생 오류동 일대 지역의 교육을 위해 활동하였다.

 

송두용은 오류동에서 함석헌(咸錫憲, 1901~1989)과 함께 7년 동안 농업에 종사하면서 종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태어났다. 1923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24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송두용과 함께 성서조선 6인 동인지를 창간하였고 1942년 ‘성서조선’ 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그해 11월 발생한 신의주 학생 의거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1947년 3월 단신으로 월남, 오류동에 정착하여 7년 동안 거주하면서 종교활동과 아울러 양계업으로 생활하였다. 당시 함석헌의 양계장은 오류시장에서 개봉동 잣절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으며 이 지역 주민들이 거기에 가서 양계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송두용과 함석헌은 같은 시기에 동경 유학을 했고 동인지 활동은 물론, 같은 사유로 옥고를 치르는 등의 이유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함석헌이 월남하고 바로 오류동으로 송두용을 찾아 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함석헌의 명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는 이 무렵에 쓴 것으로 보인다. 

 

함석헌은 1970년에 『씨알의 소리』 창간호를 발행하고 반독재 투쟁과 민중 계몽운동에 힘썼다. 함석헌은 40년 이상을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았는데 1947년 11월 북한산 등정 모임에서 1일 1식 결단을 했다고 한다.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에 <1일 1식으로 일관한 그의 식생활은 누구 영향인지 잘 모르겠으나 그는 하루 한 끼만 먹고 90년 가까운 기나긴 인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라고 나온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1947)

                                                 함석헌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하 생략

 


<땅이름 이야기>

 

버들이마을

 

오류동역 앞 북쪽 마을을 일컫는 것으로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경인철도 오류동역이 191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생긴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 역 앞 일대를 운치 있고 휴식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빨리 조성하기 위하여 성장이 빠른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인로로 인해 남북으로 갈라져 한 마을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기 어렵다. 

 

텃골

 

오류1동인 텃골은 오류초등학교 서쪽으로 고척로를 건너 수궁동 경계까지의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1984년 고척로가 개통되면서 이 마을은 동서로 갈리게 되었다. 오류동에서는 큰 마을이라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며 터 기(基)와 골 곡(谷)자를 써서 기곡이라고 했고 맨 안쪽에 있어서 안동네라고도 하였다.

 

▶텃골문학공원에서 본 텃골

 

2014년 말 구로구에서는 매봉산 자락의 어울림아파트 아래쪽 부분, 텃골의 제일 윗 지역에  ‘텃골문학공원’을 조성하였다. 

 

▶텃골문학공원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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