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동(梧柳洞) -⓵
<오류지역 약사>
오류동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1800년대 후반까지 현재 구로구의 개봉동, 고척동, 수궁동, 천왕동, 항동지역 등과 함께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속한 지역이었다.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 부평도호부인데 이 관아가 지금도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의 부평초등학교 안에 있다.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 337군으로 개편할 때 오류동은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仁川府 富平郡 水呑面) 오류리였다. 다음해인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 경기도에 속하는 부평군 수탄면 오류동이 되었다.
또한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부평군과 인천군(府內面과 多所面을 인천부로 하고 남은 지역) 일부를 합쳐 부평의 부(富)자와 인천의 천(川)자를 따서 부천군(富川郡)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부평군 수탄면은 부천군 계남면(桂南面)이 되었는데 계남은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있는 계양산(해발 395.4m)의 남쪽에서 따온 것이다.
이 과정을 보면 1895년에 오류리, 1896년부터 1914년 4월까지는 오류동, 그 이후에는 다시 오류리로 바뀌었다. 이런 내용은 구로구지(1997년 발행)와 서울지명사전(2009년 발행)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어떤 연유로 변경이 되었는지 설명이 없어 확인할 길은 없다.
1931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05호에 의해 계남면이 소사면(素砂面)으로 바뀌었고 1941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253호에 의해 다시 소사읍 오류리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시의 행정구역을 확장하기 위해 부천군 소사읍 일부를 서울시에 편입할 때 오류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동이 되었고 오류동 전 지역과 천왕동을 관할하였다.
새로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서울특별시조례 제276호에 의해 동일자로 영등포구에 5개의 출장소를 신설하였는데, 이때 오류동은 개봉동, 고척동, 궁동, 온수동, 천왕동, 항동지역과 함께 오류출장소(梧柳出張所)에 속하였다.
1968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491호에 의해 오류출장소가 폐지되면서 오류동은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0년 5월 5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해 오류동에 수궁동이 통합되어 오류동, 천왕동은 물론, 수궁동 관할이었던 궁동, 온수동, 항동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981호에 의해 오류동이 2개의 동으로 분동되었는데 오류1동 관할은 경인철도 북쪽지역이고 오류2동은 경인철도 남쪽지역과 천왕동, 항동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영등포구에서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구로구가 분구될 때 오류동을 비롯한 인근 지역은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들 지역은 개발에 힘입어 인구가 늘어나면서 1988년 7월 1일 구로구 조례 제59호에 의해 오류1동에서 수궁동이 다시 분동되어 떨어져 나갔다. 또한 오류2동 관할이었던 항동에 5,000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건립으로 주민 수가 13,000명이 넘게 됨에 따라 구로구 조례 제1422호에 의해 2020년 1월 1일 오류2동은 천왕동을 남겨두고 항동과 분동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땅이름 이야기>
서울지명사전에 오류동은 예부터 오동나무(梧)와 버드나무(柳)가 많이 있어 오류꿀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나온다. 또한 디지털구로문화대전에는 일제강점기에 오류동역 앞 광장을 마을 쉼터로 운치 있게 조성하기 위해 성장 속도가 빠른 버드나무와 오동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오류동역앞 광장에는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를 한그루씩 심어놓고 위의 내용을 안내판에 써 놓았다. 그러나 오류라는 지명은 1894년 갑오개혁 이전부터 쓰였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과 연관 짓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류동역앞 광장(오동나무와 버드나무)
전국에는 오류동(梧柳洞)과 오류동(五柳洞) 또는 오류리((五柳里)라는 이름을 쓰는 지역이 20개에 이를 정도로 많다.
인천광역시 계양구 오류동(梧柳洞)은 마을에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 오리울, 오릿골,오류울, 오류동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인천광역시 서구 오류동(梧柳洞)은 조선조 중엽 이전, 이 마을에 오동나무숲이 많았으며 그 옆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이들 나무의 이름을 따서 오류리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대전광역시 중구 오류동(五柳洞)은 다리 아래로 길 가에 다섯 그루의 능수버들이 있어서 오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류동(梧柳洞)이나 오류동((五柳洞)은 거의 모든 곳이 대부분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연관되어 있지만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도 버드나무를 사랑하여 자신의 집 주위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버드나무를 차용하여 동네 이름을 지어서 부르고 자신의 호로 쓸 만큼 옛날에는 버드나무가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역 이야기>
오류동은 1896년 8월 4일 이전에는 오류리이었으나 같은 해 같은 날 칙령 제36호에 의해 전국이 13도로 나누어질 때부터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부천군으로 개편될 때까지 18년 동안 오류동이었던 것이 자료에 나온다. 이후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기 이전 까지 다시 오류리로 되었다. 그러나 1963년 이전에도 오류리로만 불린 게 아니라 오류골 또는 오류동이 함께 사용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는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33.8km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때 개설된 역이 노량진, 오류동, 소사, 부평, 우각동, 유현, 인천 등 7개역이다. 일반적으로 기차역이나 전철역의 이름을 정할 때 OO동이나 OO리라면 OO동역, OO리역 보다는 OO역으로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류동역
오류동역은 철도를 개통할 때부터 붙인 이름이다. 당시 행정구역명을 따라서 오류동역으로 지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노량진역이나 소사역이 ‘리’자를 빼고 지은 것처럼 오류동도 ‘동’자를 빼고 오류역으로 짓는 게 더 합당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논개’를 쓴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1898~1961)는 지금의 부천시 고강동이 고향이다. 고려 때 부천을 수주라고 한대서 자신의 아호를 수주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시 ‘논개는 1922년 <신생활(新生活)> 4월호에 발표되었으며 1923년 시집 <조선(朝鮮)의 마음>에 실렸다.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이하 생략 -
변영로는 술에 대한 일화를 소재로 ‘명정 40년’이라는 산문집을 썼다. 그 책에 보면 20대 때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물동이를 이고 가는 일가 여인을 붙잡고 입을 맞추다가 같이 쓰러진 일이 있었다. 며칠 동안 꼼짝도 못하고 방안에 처박혀 있다가 어느 어스레한 저녁 무렵 쥐도 개도 모르게 오류동으로 나와 상경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변영로의 20대는 1918년 이후로 오류동의 행정구역명이 오류리로 바뀐 지 최소한 4년이 지난 때이다.

▶명정 40년(변영로)
1932년 4월부터 1933년 7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장편소설 ‘흙’에도 오류동이 두 차례 나온다. 한번은 <그것은 바로 정선이가 갑진이와 같이 오류동으로 가던 날 전날 아침이었다.>이다. 또 한번은 <오류동 철로 길에서 차에 치어 죽은 홍, 김 두 여자를 정선은 비웃었었다.>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때는 오류리로 바뀌고 18년이나 지난 다음이다.
이런 것으로 볼 때 1914년 이전에 18년 동안이나 행정구역명이 오류동으로 되었던 연유가 확인돼야 알 수 있겠지만 청학동이나 선유동처럼 오류동 그 자체가 하나의 지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유추를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