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척동(高尺洞) -③
<고척2동 마을 이야기>
덕의리(德義里)
덕의리는 고척2동주민센터와 덕의초등학교 주변에 있는 마을로 이 지역에 오래 살고 있는 주민들은 덩어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구전되는 과정에서 덩어리로 불리고 있다고 되어 있다. 덩어리에 대한 유래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덕의리가 덩어리로 된 게 아니라 덩어리를 한자화 하면서 덕의리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땅이름의 한자화는 신라 경덕왕(742년~765년) 때부터 이루어진 일이다.

▶덕의리 마을 이름을 살려 쓴 덕의초등학교
고척2동주민센터 옆 고척파크푸르지오 아파트단지 후문 입구에 덕의리 유래비가 있는데 ‘덕의리는 고척동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지역으로 사람들은 덩어리로 부르고 있다.’고 새겨져 있다.

▶덕의리 유래비(고척파크푸르지오 아파트 단지 입구)
예전에 공주나 옹주가 타던 가마를 ‘덩’이라고 했으며 덕응(德應)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덕응방(德應房)은 궁중의 공주와 옹주 등의 덩을 맡아 관리하던 곳이다. 이같이 덩이 덕이 된 것처럼 덕의리는 큰 덕(德), 덕 덕(德)자로 여기에 어울리며 뜻도 좋은 옳을 의(義)자를 합쳐서 덕의리로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덕의리에는 청주 한씨(淸州 韓氏), 청주 신씨(淸州 申氏), 청주 경씨 (淸州 慶氏) 등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청주 경씨는 1870년경 경기도 여주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삼공구(三工區)사택
일제강점기 영등포교도소 자리에서 일본인 고바야시가 운영하던 소림광업소(小林鑛業所)에 근무하는 종업원들의 숙소인 삼공구사택이 덕의리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고척119안전센터 일대로 삼공구주택 또는 삼공구마을이라고도 한다. 삼공구는 세 번째 공구를 뜻하는 것으로 영등포교도소 옛 부지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2010년 무렵까지 이 삼공구사택이 있던 곳 옆에 삼공이라는 상호를 쓰는 삼공다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삼공구에서 그 이름을 딴 게 아닌가 한다. 지금 그 자리에는 빌라가 자리를 잡고 있다.
▶삼공구사택이 있던 곳(고척119안전센터 일대)
현화마을
덕의초등학교 앞 도로 건너편 안쪽에 있는 고척동성당 주변을 현화마을이라고 했다. 성당 맞은 편 오래 된 빌라 벽체에 남아있는 ‘현화가든빌라’라는 글자에서 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 지금은 마을이름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현화마을 원주민이거나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오래 전에 이 마을 사람들의 모임인 ‘현화 친목회’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요즘도 가끔 만나서 옛정을 나눈다고 한다.
고척로를 사이에 두고 현화마을은 남쪽, 덕의리는 북쪽에 있다. 덕의리 출신 사람들도 예전에 ‘덩어리 친목회’를 만들어 우의를 나누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이 친목회에 고령자가 많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인정 역할을 하면서 덕의경로당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덕의리와 현화마을에 관한 여러 이야기는 이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살고 있는 청주 한씨 어르신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화마을(고척동성당 주변)
여계(呂稽) 묘역
고척2동 덕의리에 조선전기의 문신인 여계와 그 부인의 묘역이 있다. 여계(?~1421)의 본관은 함양으로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부친은 조선 초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와 형조판서를 지낸 여칭(呂稱)이다. 현재 함양 여씨 가문 사람들의 90% 이상이 여계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척2동주민센터에서 서쪽으로 200여 미터쯤 가면 오른쪽에 덕의근린공원이 나온다. 그 공원 안에 묘역으로 통하는 가파른 돌계단이 보이고 계단 끝으로 태극 문양이 그려진 문 안쪽에 여계 묘역이 있다.

▶여계 묘역(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여계 묘역은 세종 10년(1428년)에 건립되었다. 묘지에 설치된 기단석과 묘비, 문무관석 등은 조선 초기의 묘지 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을 받고 있다. 1991년 12월 24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으며 개봉1동에 있는 함양 여씨 대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편(세종 5년 3월 28일)에 보면 여계의 부친 여칭에 대한 것으로 ‘여칭은 73세에 별세했으며 부고(訃告)를 듣고 조회를 3일 동안 폐하였고 정평(靖平)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아들은 여계와 여뇌(呂賚) 둘 이었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